2012년 9월 12일 수요일

중도의 길을 말한다 (폴 새뮤얼슨)


A Centrist Proclamation
지은이: 폴 새뮤얼슨

출처: 다음 저서의 권두언을 발췌.  
(폴 새뮤얼슨/윌리엄 노드하우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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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발전하기도 하지만 퇴보하기도 한다. 경제학도 그렇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경제학을 소개하는 주력 교과서들은 생기도 의미도 잃고 말았다. 자연은 공백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이 교과서는 1948년 새뮤얼슨의 《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초판이 나온 이래 대학 교육에 거시경제학을 보급했고, 세계화의 물결이 강도를 더해가는 세상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귀감으로 기여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경제도 경제학도 엄청나게 변했다. 판을 거듭하면서 새뮤얼슨과 노드하우스의 《경제학》으로 이름을 바꾼 이 교과서는 세계경제가 밟아 온 변화를 책에 담았고, 경제학이라는 학문의 최전선을 개척해가는 엄밀한 경제적 사고의 최신 내용을 제공했다.

초판 이래 여러 가지 수정이 많았지만, 놀랍게도 이번의 제19판이 아마도 가장 큰 수정일 것 이다. 이번 판을 우리는 중도주의 교과서라고 부른다. 이 수정판 교과서는 혼합경제의 가치를 주창한다. 혼합경제란, 엄격한 원리 원칙에 따른 시장 운영과 정부의 공정한 감독을 결합하는 경제를 말한다.

오늘날 중도주의가 극히 중요한 이유는 세계경제가 처참하게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1930년대 대공황 이래 출현했던 순환적 침체 가운데 최악의 사태일 것이다. 통탄할 일은, 많은 교과서들이 자만과 독선으로 치달은 자유지상주의 쪽으로 지나치게 멀리 나갔다는 것이다. 이 교과서들은 자유방임적 금융을 찬미하는 데 나섰고 정부의 규제와 감독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방향만을 치켜세웠다가 지금 쓰라린 결과를 보고 있다. 비이성적으로 과열된 주택시장과 주식시장이 결국 붕괴하면서 지금의 금융위기를 몰고 온 것이다.

우리가 묘사하는 중도주의는 무슨 처방이 아니다. 독자들더러 본래 신념과 다르게 이리 생각하라거나 저리 판단하라고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분석가이지 인기 있는 처방을 내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주제로 삼는 중도주의는 이데올로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이에크-프리드먼의 자유지상주의나 마르크스-레닌의 관료적 공산주의가 빚은 결과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사실과 이론을 체를 치듯 걸러낼 뿐이다. 최상의 윤리와 가치판단은 각 독자가 알아서 자기 입장을 결정하면 된다.

그러한 경제 문제를 두루 살펴볼 때 경제사를 통해 확인하는 사실은 이것이다. 즉 정부규제를 걷어낸 자유방임 자본주의나 과도하게 규제하는 중앙계획이나 현대 사회를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좌파와 우파가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본다면 중도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 지난 20세기 중엽 광활한 공산주의권에서 엄격한 통제를 수반하는 중앙계획이 득세했지만, 경제 침체와 소비자 불만이 커져서 결국 폐기되었다.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은 노예의 길로 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들이 반대한다던 노예의 길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보장과 최저임금과 누진세제를 비롯해 국립공원과 환경을 보호하고 지구 온난화를 억제하기 위한 정부 개입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 프로그램은 고소득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이 지지하는 것들이다. 그러한 정책이 표방하는 혼합경제는 법의 지배를 확립함과 동시에 경쟁의 자유를 제한적으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중도주의적 견지에서 경제학을 풀어간다. 그동안 중국과 인도,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신흥 국가의 수많은 학생들이 경제적 지혜를 얻기 위해 이 책을 찾았다. 우리 저자들의 임무는 경제학자들이 갈고닦은 최신의 생각 또 최선의 생각을 책에 담아내는 것이다. 아울러 현대 혼합경제의 논리를 묘사하고 동시에 그 논리를 비판하는 좌우파의 시각을 언제나 치우침 없이 공정하게 소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중도 선언에 한마디 더 보태고자 한다. 우리는 ‘제한적 중도주의(limited centrism)’가 틀림없이 존재한다고 본다. 우리의 지식은 불완전하고 사회의 자원은 제한적이다. 게다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는 지금 아주 힘겨운 난관에 처해 있다.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고통스러운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초래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공급 측면 중심의 재정 원리가 엄청난 재정적자를 유발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또한 현대적 금융의 대단한 혁신이라는 것들이 정부규제가 없는 시스템에서 작동하면 수조 달러의 손실을 내서 유서 깊은 금융기관들을 폐허로 만들어버린다는 것도 지켜보았다.

우리 사회가 나아가는 지향점을 다시 제한적 중도로 되돌려야 한다. 그래야만 세계경제가, 진보의 결실이 좀 더 골고루 분배되는 완전고용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폴 새뮤얼슨(Paul A. Samuelson)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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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다음 저서의 권두언을 발췌.  
《새뮤얼슨의 경제학》원저 제19판의 상권

※ 밑줄은 이 책의 역자인 현 게시물 작성자가 추가해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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